필사 중)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 이사금 편

  // 필사 중)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 이사금 편  일성(逸聖) 이사금(尼師今) 고서보기 원년 8월 일성이사금이 즉위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9월 사면령을 내리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1월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3년 1월 관리를 임명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4년 2월 말갈이 침략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5년 2월 정사당을 설치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5년 7월 열병을 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5년 10월 태백산에 제사를 지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6년 7월 서리가 내리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6년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6년 10월 말갈이 다시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7년 2월 말갈의 침략에 대비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8년 9월 일식이 일어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9년 7월 말갈 정벌을 논의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0년 2월 궁실을 수리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0년 6월 형혹이 진성을 범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0년 11월 천둥이 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1년 2월 제방 수리와 농지 개척을 명하고, 사치에 대한 금령을 내리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2년 가뭄이 들어 진휼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3년 10월 압독의 반란을 평정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4년 7월 인재 천거령을 내리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5년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하다 //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하다 ( 148년 (음) ) 15년(148)에 박아도(朴阿道)註 001를 갈문왕(葛文王)註 002에 봉하였다. 신라에서는 추봉(追封)한 왕...

필사 중)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

필사 중)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 권 제17 고구려본기 제5  >   선찬(宣撰)  >   선찬(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으로 퇴직[致仕]한 신하 김부식(金富軾)이 왕명(王命)을 받아 편찬하였다.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東川王)·중천왕(中川王)·서천왕(西川王)·봉상왕(烽上王)·미천왕(美川王) // 동천왕(東川王) 고서보기 원년 5월 동천왕이 왕위에 오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2월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3월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4년 7월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8년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8년 9월 태후 우씨가 사망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0년 2월 오나라가 보낸 사신을 참수하여 위나라에 보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1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2년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6년 서안평을 공격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7년 연불을 태자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9년 3월 동해인이 미녀를 바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19년 10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0년 8월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오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0년 10월 밀우와 유유가 동천왕을 지키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 21년 2월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권 제17 고구려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계왕 편

필사 중)삼국사기 백제본기 계왕 편 // 계왕(契王) 고서보기 // 원년 10월 계왕이 즉위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계왕이 즉위하다 ( 344년 10월(음) ) 계왕(契王)註 001은 분서왕(汾西王)의 맏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처음이 분서왕이 돌아가셨을 때 계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며, 비류왕(比流王)이 재위 41년(344)에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契王, 汾西王之長子也. 天資剛勇, 善騎射. 初汾西之薨也, 契王㓜不得立, 比流王在位四十一年薨, 即位.校勘 001 校勘 001 《삼국사절요》에 의하면 契王二年夏四月謁始祖東明廟가 추가되어야 한다. 註 001 계왕(契王) : 백제 제12대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344~346년이다. 계왕은 즉위년 기사와 사망 기사뿐인데, 후대에 백제 왕실계보와 기년을 맞추기 위해 삽입된 인물로 보기도 한다. 즉, 근초고왕대에 국사를 편찬하면서 6주갑(360년)마다 국가의 흥운을 맞이한다는 한(漢)나라 양웅(陽雄)이 편찬한 『태원경(太元經)』의 영향을 받아 개국 연대를 근초고왕 기준으로 360년 이전으로 잡았으며, 그 영향으로 나중에 삽입되었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金哲埈, 1975, 『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49~50쪽). 본서 권32 제사1은 옛 기록[古記]를 인용하여 계왕 2년(345) 4월에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는 기사를 수록하였지만, 본기에는 관련 기사가 없다. // 3년 9월 계왕이 죽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계왕이 죽다 ( 346년 09월(음) ) 3년(346)註 001 가을 9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三年, 秋九月, 王薨. 註 001 3년 :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따른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왕력편에는 “갑술(甲戌)에 즉위하여 2년을 다스렸다”고 적혀 있다.

필사 중)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편

필사 중)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편 // 목차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고서보기 원년 3월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오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4월 태종무열왕의 아버지를 추봉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4월 죄수를 사면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5월 율령을 다듬어 정하게 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5월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봉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1월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고구려가 북쪽의 변경을 침략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3월 당이 고구려를 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3월 법민을 태자로 삼고 여러 왕자의 관등을 올려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10월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10월 굴불군에서 흰 돼지를 바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10월 태종무열왕의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을 보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10월 월성 안에 고루를 세우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3년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오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3년 7월 문왕을 당에 보내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4년 7월 여러 재이가 일어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5년 1월 중시인 문충을 이찬으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5년 3월 하슬라를 주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6년 4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6년 8월 아찬 진주를 병부령으로 삼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6년 9월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치고 공주에서 큰 물고기가 죽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

삼한통일전쟁 칠중성 전투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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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통일전쟁 칠중성 전투 사료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 660년 11월01일(음) ) //원문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主校勘 001匹夫死之. //번역문 〔7년(660)〕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註 001을 침공하여 군주(軍主) 필부(匹夫)註 002가 전사하였다. //교주 校勘 001 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결각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석 註 001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에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7년(638) 3월조 참조. 註 002 필부(匹夫): 본서 권제47 열전제 7 필부(匹夫)조에 의하면, 신라 왕경(王京)의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찬(阿湌) 존대(尊臺)라고 한다. 또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0월에 고구려의 군사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힘써 싸우다가 죽으므로 태종무열왕이 급찬(級湌)의 관등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신라본기의 기사는 칠중성의 군주(정덕본과 을해년 목활자본에는 ‘주’자가 결락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따라 보입함)였다고 하였으나, 군주는 주(州)의 장관으로 칠중성이 주급(州級)의 행정구역이 아니므로 열전에 기록된 ‘현령(縣令)’이 옳다. 한편 필부열전에는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이 10월에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본기의 기록은 11월 1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가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신라본기와 열전 기록의 전거가 달랐다고 여겨진다. 필부열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할 때, 필부가 지휘하여 20여 일을 버티자, 고구려군이 물러났고, 대나마 비삽(比歃)이 고구려와 내통하여 다시 고구려 군사가 공격하여 왔다고 하였으므로, 열전의 기록처럼 10월에 공략하기 시작하여, 신라본기 기록처럼 11월 1일에 필부가 전사하였다고 보면, 이 전투의 진행 과정에 관한 두 기록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5 > 미천왕(美川王) > 낙랑군을 따먹다.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5 > 미천왕(美川王) > 낙랑군을 따먹다.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5 > 미천왕(美川王) > 낙랑군을 침략하다 원문 국역글자 크게글자 작게이전 기사다음 기사출력 글자 크게글자 작게 낙랑군을 침략하다 ( 313년 10월(음) )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지명 : 樂浪郡 글자 크게글자 작게 낙랑군을 침략하다 ( 313년 10월(음) )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註 001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註 002 註 001 낙랑군(樂浪郡) : 한무제 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여 313년까지 존속한 중국 왕조의 변군(邊郡).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하며, 군치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에 설치한 조선현(지금의 평양)이다. 고구려본기에는 낙랑 멸망과 관련된 기사가 대무신왕조에 2건이 보이는데, 이 대무신왕조 기사가 고구려가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낙랑군을 병합한 기사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들 기사에 대해서는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5년(32) 4월조 및 20년(37)조 참조. 註 002 낙랑군(樂悢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이때 낙랑군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에 대하여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에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서진은 274년에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말한 고구려 멸망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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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말한 고구려 멸망 원인 [김부식이 고구려를 논하다 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註 001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 밭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註 002를 만들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집의 문을 닫지 않으며, 부인은 지조가 굳고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데에는 변두(籩豆)註 003를 사용하였으니 이는 어질고 현명한 이가 가르쳐 착한 길로 인도한 것이다. 또 천성이 유순한 것이 3방(三方)註 004과 달랐으므로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효사(爻辭)에는 “2는 칭찬이 많고, 4는 두려움이 많아 가깝다.”註 005라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아[有司]가 있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분에 넘치는[僭竊] 이름과 자리를 가졌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편안할 때가 거의 없었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아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어떤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뭇사람이 화목할 때는 아무리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의롭지 않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사람의 원망을 일으키게 되면서 무너져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