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중)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
필사 중)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
권 제17 고구려본기 제5 > 선찬(宣撰) >
선찬(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예부사(判尙書吏禮部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으로 퇴직[致仕]한 신하 김부식(金富軾)이 왕명(王命)을 받아 편찬하였다.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東川王)·중천왕(中川王)·서천왕(西川王)·봉상왕(烽上王)·미천왕(美川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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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東川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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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5월 동천왕이 왕위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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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2월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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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3월 우씨를 왕태후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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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7월 명림어수를 국상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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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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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9월 태후 우씨가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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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2월 오나라가 보낸 사신을 참수하여 위나라에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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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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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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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서안평을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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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연불을 태자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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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3월 동해인이 미녀를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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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10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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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8월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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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10월 밀우와 유유가 동천왕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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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2월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권 제17 고구려본기 제5 > 동천왕(東川王) > 21년 2월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0247년 02월 (음))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 247년 02월(음) )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註 001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註 002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註 003와 사직(社稷)註 004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註 005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註 006”라고 하였다.註 007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勘 001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校勘 001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本으로 되어 있다.
註 001
환도성(丸都城) : 산상왕 2년(198)에 축성을 시작하고, 산상왕 13년(209) 10월에 도읍을 옮긴 고구려의 도성이다. 본서 권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2년(198) 2월조 참조.
註 002
평양성(平壤城) : 이 기사의 평양성 위치에 대해서는 현 북한 평양설(채희국, 25~26쪽 ; 정찬영, 14쪽; 손영종, 153~154쪽), 현 북한 자강도 강계설(이병도, 373쪽; 徐永大, 114~137쪽). 현 지안시 동대자(東台子)유적설(魏存成, 33쪽), 현 지안시 양민지역설(張福有, 14~15쪽; 임기환, 252쪽), 환런[桓仁]지역 나합성설(조법종, 188~194쪽), 현 집안현성[국내성]설(심광주, 181쪽; 김희선, 154~155쪽; 여호규, 76쪽, 강진원, 211~213쪽; 기경량, 254~260쪽) 등이 있다.
현 북한 평양설은 북한학계의 주류 견해인데, 당시는 북한 평양지역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수용하기 어렵다. 여러 견해 중 현 지안시 평지성인 집안현성[국내성]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견해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이른바 국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성벽 및 성 내부 발굴 조사 결과 3세기 후반 이상으로 올라가는 유적을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동천왕 때에 과연 현존 국내성의 성벽이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성벽 축조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현 국내성 일대가 도읍으로서 거주지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양’이란 이름은 고구려왕의 장지명인 동양(東壤), 중양(中壤), 서양(西壤), 호양(好壤)이란 지명에서 유추하자면 집안 일대의 너른 평지를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천왕 21년(247)의 평양성 위치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권순홍, 5~14쪽 참조.
〈참고문헌〉
鳥居龍藏, 1914 「丸都城及び国內城の位置に就きて」, 『史学雑誌』 25-7
채희국, 1965, 「평양성(장안성)의 축성 과정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5-3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6-2
徐永大, 1981,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 『韓國文化』 2
魏存成, 1985, 「高句丽初·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2, 北方文物杂志社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법종, 2001, 「고구려 사회의 단군인식과 종교문화적 특징」, 『한국고대사연구』 21
张福有, 2004, 「高句丽第一个平壤城在集安良民即国之东北大镇-新城」, 『东北史地』2004-4
심광주, 2005, 「고구려 國家形成期의 城郭 硏究」, 『고구려의 국가 형성』, 고구려연구재단
김희선, 2010, 「高句麗 國內城 硏究」, 『白山學報』 87
여호규, 2014, 「고구려 도성의 구조와 경관의 변화」, 『삼국시대의 고고학개론 1』, 진인진
임기환, 2015, 「고구려 國內都城의 형성과 공간구성-문헌 검토를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99
강진원, 2018 「고구려 국내도읍기 王城의 추이와 집권력 강화-내적 변화의 외적 동기와 관련하여-」, 『한국문화』 82
기경량, 2018, 「환도성·국내성의 성격과 집안 지역 왕도 공간의 구성」, 『사학연구』 129
권순홍, 2019, 「고구려 ‘평양’의 변천과 전기 평양성의 위치에 관한 쟁점 검토」, 『역사문화연구』 70
註 003
종묘(宗廟) : 왕실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위한 사당. 중국에서 한대 이후 사직과 함께 널리 제도화되어 궁궐의 동쪽에 두었다. 고구려가 중국식의 종묘제를 수용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涓[消]奴部가 본래 국주(國主)였는데, 지금은 비록 왕이 아니지만 적통대인(適統大人)은 고추가(古鄒加)를 칭하고 역시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 제사를 지낸다.”라는 기사에서 소노부가 왕실이었던 이른 시기에 ‘종묘(宗廟)’로 표현되는 공간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삼국지』 고구려전에 “궁실(宮室)을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궁궐) 거처의 좌우에 대옥(大屋)을 세우고 귀신(鬼神)을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사직(社稷)을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귀신(鬼神)은 조상신을 뜻하며, 따라서 궁궐 좌우에 세운 대옥(大屋)은 종묘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강진원, 32쪽). 물론 이는 중국식 종묘라기보다는 고구려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독자적인 성격의 사당을 ‘종묘’로 표현하였을 것이다(서영대, 2005). 그리고 『삼국지』 고구려전의 기사가 동천왕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당시 고구려에서는 계루부 왕실 외에도 소노부 등 복수의 종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서영대, 2005, 「고구려의 社稷과 靈星에 대하여」,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 고구려연구재단
강진원, 2015, 「고구려 宗廟制의 전개와 변천」, 『高句麗渤海硏究』 53
註 004
사직(社稷) : ‘사(社)’는 토지신(土地神)이고, ‘직(稷)’은 곡물신(穀神)인데, 중국에서 춘추시대부터 함께 국가의 중요한 제사로 제도화되기 시작하여 한대 이후 보편화되었다. 고구려에서 중국식 사직의 수용 여부나 수용 시기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궁실(宮室)을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궁궐) 거처의 좌우에 대옥(大屋)을 세우고 귀신(鬼神)을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을 제사지낸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사직이 중국식 제도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며, 아마도 고구려 고유의 농업신에 대한 제사를 ‘사직’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서영대, 2005, 「고구려의 社稷과 靈星에 대하여」,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 고구려연구재단). 그리고 영성과 사직을 조상신과 더불어 궁실의 대옥(大屋) 에 모셨는지 여부도 이 문장으로는 불분명하지만, 본래 중국에서도 사직을 옥외에 안치하는 예를 고려하면 영성, 사직 역시 별도로 안치되었을 것이다.
註 005
왕검(王儉) : 단군(檀君) 왕검을 말한다. 본문의 기록은 본서 중에서 단군 왕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예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고조선조에서 인용된 고기(古記)에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부르고 … 평양성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단군이 도읍한 곳이 평양이었다는 본문의 언급은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고기’와 유사한 자료에 의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註 006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 : 원문인 “王之都王險”은 “왕의 도읍인 왕검(王險)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문의 표현은 『사기』 권115 열전55 조선에 “〔위만이〕 점차 진번, 조선만이와 옛 연과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다[王之, 都王險]”라는 문장의 마지막 부분과 일치하고 있어 ‘或云’이란 『사기』 조선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본문과 같이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75쪽).
한편 이병도는 본서의 찬자가 『사기』 조선전의 위만 관계 기사를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 잘못 읽은 결과 본문과 같이 단군 관련 기록으로 인용하였다고 보았다(이병도, 267쪽). 그러나 이것을 본서 찬자의 오류라고 속단할 수 없다. “或云王之都王險”을 첨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왕검(王險/王儉)이 인명(人名)이 아닌 지명(地名)으로 사용된 경우를 언급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476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1997, 『譯註 三國史記 2-번역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註 007
평양은 본래 … 라고 하였다 : 중종 임신간본에서는 이 부분이 본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보아 이 부분은 분주가 되어야 옳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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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2월 신라와 화친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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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9월 동천왕이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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